영화정보 / / 2023. 8. 30. 09:57

영화 '오펜하이머' 리뷰와 감상평

영화 '오펜하이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적인 방식으로 영화가 흘러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분이라는 러닝 타임이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게 흘러갑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긴박한 파트라고 할 수 있을 트리니티 실험 시퀀스도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긴박감을 연출하는 구간을 재보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겨우 20분 정도만 차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시간들이 오펜하이머란 인물이 마주쳤었던 역사 속의 인물들과, 그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졌었던 수많은 과학적, 그리고 정치적인 논쟁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감독: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감독:크리스토퍼 놀란)

 

목차

    1. 오펜하이머 아쉬운 흥행 기록

    2차 세계대전과 핵폭탄 개발 및 투하 작전에서 비롯될 만한 긴박감이나 웅장함을 기대하고 갔다가, 3시간 내내 휘몰아치듯 쏟아지는 엄청난 대사들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보량을 마주하며, 당혹스러운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셨을 분들도 분명히 계셨을 겁니다. 사실, 오펜하이머도 논란의 영화답게 IMAX로 촬영됐음이 중점적으로 홍보되며, 영화의 화면이 얼마나 웅장 할지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기존의 기대와 어긋났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영화에서 재미를 느끼셨던 분들도 아마 극장을 나오면서는 이런 의문점을 가져보셨을 겁니다. 일단 재미있게 보긴 봤는데, 도대체 이 영화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는 의문을 말이죠. 그래서 오펜하이머 영화와 관련해서는 매우 다양한 관점들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영화가 주는 그 재미의 비결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에, 이번 영상은 이 정적인 영화가 어떻게 우리들에게 재미를 줬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보려 합니다. 

    2. 영화 오펜하이머의 구성

    일단 영화의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거의 정확하게 180분의 러닝 타임이 3 분할되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구간인 영화의 시작부터 60분 지점까지는, 주인공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겪었던 다양한 시행착오들과 그 과정 속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과정을 거치며, 정확하게 60분이 흐른 두 번째 구간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아내인 키티(에머린 블런트)와 함께 로스앨러모스 기지에 입주를 하며, 120분이 되는 시점까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해 나갑니다. 
    그리고 거의 정확하게 120분이 된 시점, 오펜하이머가 완성한 2개의 장치가 차에 실려 나가는 장면이 나오며, 그가 선택했었던 것들이 그의 손을 떠나서 가져오게 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남은 60분 동안 담아나가죠.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영화의 물리적인 시간을 3 분할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3 분할을 하며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나머지 두 이야기가 둘러싸는 듯한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가 여러 사람을 만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가는 중심 과정을, 오펜하이머의 안보 청문회, 루이 스트로스(로버트다우니주니어)의 인사청문회라는 두 가지 렌즈를 개입시켜서, 서로 다른 시점에서의 이야기가 상호작용을 하는 듯한 독특한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해당 이야기 구조를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야말로 삼위일체 3개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세 개의 이야기가 함께 존재해야 영화가 완성되는 듯한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가 독특한 재미를 주는 이유는, 실존 인물, 오펜하이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며, 그가 이뤄낸 성취를 단선적으로 그려내는 흔하디 흔한 윈전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가 이뤄낸 성취를 중심에 두고, 나머지 두 개의 이야기를 양쪽에 배치하여, 그가 해왔었던 선택들이 어떤 위대함과 어떤 비루함을 함께 갖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조명해내고 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핵무기의 공포가 아니라, 오펜하이머와 오펜하이머의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 풍부한 모순적 태도였습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는 바로 그 모순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그것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었던 거대 사건의 가장 중심에 선 위대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비루한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말이죠.

    3. 오펜하이머와 인물들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인공이니 만큼, 가장 많은 모순을 보여주는 오펜하이머는 학문적 진실을 탐구하는 과학자에서 핵무기를 창조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으며, 처음엔 핵무기의 위력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가, 이후에는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군비 경쟁이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며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지적 호기심과 성적 욕망 때문에 불필요한 관계들을 유지하며, 동료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험과 불행에 빠뜨리는 단추를 만들어냈었죠. 


    그리고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시기심과 의구심을 품은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역시도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부정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오펜하이머의 오만함은 필요 이상의 적을 만들어낸다고 했던 그의 서술과,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부인 키티(에밀리 블런트)는, 첫째 아들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도 상황을 가장 냉철하게 꿰뚫어 보며, 오펜하이머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또한, 오펜하이머의 불륜 상대인 진 테틀록(플로렌스 퓨)은 꽃다발을 사서 자신을 찾아오는 오펜하이머의 애정을 무시하다가도, 돌아선 뒤에는 오히려 오펜하이머에게 먼저 전화를 하며 집착하는 모순적인 애착 심리를 보여주고, 오펜하이머가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데 가장 큰 빌미를 제공하면서도,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둬야 한다고 했던 그녀의 조언은, 실제로 오펜하이머가 완전히 파멸하지는 않도록 방어해 주는 차선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데이먼이 연기한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은 오펜하이머를 끝까지 지켜주는 동료였지만, 어쩌면 니콜스(데인 드한) 중령을 홀대했던 그의 태도가 연쇄 작용을 일으켜, 니콜스가 루이스 스트로스 편에 서서 오펜하이머를 공격하게끔 하는 촉매제가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역의 맷 데이먼과 오펜하이머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역의 맷 데이먼과 오펜하이머

    또한, 오펜하이머의 안보 문제에 또 다른 걸림돌이 됐던 오펜하이머의 UC버클리 재직 시설 동료인 프랑스어과 교수 슈발리에 교수는, 오펜하이머를 이용하여 첩보 활동을 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오펜하이머가 가장 곤란할 때에는 한밤중에도 찾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정서적인 도움과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줬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죠. 
    이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명확하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가 없는 모순적인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영화 오펜하이머 재미의 근원

    영화의 초반에서, 학문적 진실을 갈망하며 오펜하이머가 올려다봤던 그 맑고 순수한 하늘은, 영화의 후반에서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들로 가득 찬 파멸적 광경으로 변해버립니다. 
    자신의 첫 학생들과 블랙홀 논문을 완성하며, 세계는 오늘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던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에 광분하는 청중들에게도, 세계는 오늘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며, 광기에 찬 그들의 환호성을 더욱더 무아지경의 상태로 몰아넣기도 하죠.

    오펜하이머 핵실험 장면
    오펜하이머 핵실험 장면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그런 상반된 면모를 두 개의 청문회에서 재조명하며,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모순을 하나하나 끄집어냅니다. 물론 스트로스 제독의 말처럼, 두 개의 청문회는 당연히 재판이 아니지만, 우리 관객들이 스크린 바깥에서 이 청문회 속의 논쟁들을 바라보는 순간부터는 청문회는 실질적으로 그리고 또 모순적으로 재판의 성격도 함께 갖게 되죠. 


    그리고 관객들은 그 실질적인 재판을 바라보며 역사를 향한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였으므로, 오펜하이머는 여느 블록버스터처럼 스펙터클 하지도 간단명료한 선악 구도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이 어떤 분들에게는 취향에 맞지 않아 지금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IMAX를 이런 식으로도 활용할 수가 있구나 싶어서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웅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담는 것이 IMAX 활용의 정석처럼 여겨져 왔던 것과는 달리, 오펜하이머 인물의 내면에 좀 더 내밀하게 다가가는 장면에 IMAX를 활용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복잡하고 머리 아픈 것들을 멀리 하게 되는 요즘 같은 시대 무려 3시간짜리 영화로 사람들을 다시 영화관에 모으고 집중하게 만드는, 그것도 대중적인 상업 영화의 영역에서 그렇게 해내는 능력은 정말로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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